백지숙 (아뜰리에 에르메스 디렉터, 미술평론), 2012
69일 동안 지하 700미터 갱도에 갇혀 있던
광부들 33명이 구조되는 장면을, 나는 미국 동부의 작은 도시, 앰허스트에서 인터넷 생중계로 보았다. 얼마나 더 극적인 드라마를
기대했던가. 공상과학영화의 매끈한 장치들에 익숙한 나 같은 '관객'에게는 구조용 캡슐이 영 허술해보였고, 한국이라면 앵커들의
광적인 흥분과 소란스러운 각종 세리모니가 뒤덮었을 법한 현장의 분위기는 좀 썰렁하게 다가왔다. 불사조phoenix라는 이름의
캡슐이 한 시간에 한명 꼴로 깊은 땅 속에서 건져 올려 '토해 내는' 그 기나긴 여정을 다 지켜보지 못하고 나는 잠이 푹 들었다.
관광객은 아니고 그렇다고 유학생이나 이민자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으로 고립된 전원생활을 하고 있던 차에, 세계시민의 일원으로 이
재난의 가슴 벅찬 결말에 동참하려던 열망은 이렇게 사그라졌다 - 劇終 The End.
노재운 개인전, 「목련아 목련아」의 작품
목록에 <칠리안 캡슐>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어느 새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 있던 일 년 전 사건이 떠올랐다.
극은 끝났지만 기억하는 자가 있다면 새로운 시작은 언제라도 가능한 것일까. 과연 작가가 이를 어떻게 '재현'할까 궁금했다.
전시장 중앙의 높은 기둥과 나란히 세워진 <칠리안 캡슐>은, 칠레 국기 색을 없애 희게 탈색되었고, 크기와 둘레가
실제보다 줄어들어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졌다. 구조rescue의 기능은 사라진 채 약간 기울어져 서 있는 <칠리안
캡슐>은, 한편으로 내 소회를 재구성하는 듯 했다. 이를테면 폭주하는 스펙터클 사회를 넘어서 증강현실의 하이퍼 마케팅 시대에
살고 있다는 어떤 관객의 기대와는 어긋나 있는, 소박하고 단출하며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구원의 한 상징물로 말이다.
다른 한편, 이 조형물은 색상과 형태 그리고
놓여 있는 위치로 인해서 전시 전체의 주제를 아우르는 작은 기념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타인이 당한 재난을 보거나 보여주는
행위에 수반되는 윤리적 의미에 대해 사고하고, 이를 사려 깊게 제시하려는 예술적 방법들에 관한 탐구의 과정으로, 또 "오늘날
세계에 만연한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지옥을 사유하는 노재운식 예술적 실험 혹은 모험"1)의
결과로, 거기에 '갸우뚱하며' 서있다.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타인이 당한 재앙을 (설사
본의가 아니더라도) 손쉽게 대상화하는 습성이나 심지어 내놓고 즐기는 악취미를 예술가적 특권으로 남용해서도 안 될 일이다. 타인의
고통에 너무 냉담해서도 안 되고 너무 오바해서도 안 된다. 재앙의 재현은 너무 리얼해서도 안 되고 너무 추상적이어서도 안 된다.
대관절 재난과 관련한 '품위 있는' 예술적 재현은 어느 정도에서 정해지며, 과연 보는 사람들의 공감과 감정이입은 이 과정에
필수적인 것일까2) 하는 일련의 질문들에 대해 이 기념비는 즉답하기보다는, 튕겨낸다.
엄밀히 말해, 이 기념비는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 '이후post'와 긴밀하게 연관된다. 물론 모든 기념비는 사건 발생 이후의 재현과정에 준한다. 그런데 이 경우는 거기서
나아가 재앙과 그것으로 인해서 초래될 모든 결과의 총합, 그러니까 재난을 수습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나 재난 대비책의 마련은
물론이고, 대책 없이 잠복해 있는 놀랄만한 위기 등에 대한 재편까지를 포함한다. 어떤 의미에서 재난과 재난 이후는 갈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재난 이후의 경험은 분명히 사건의 식역識閾을 넘어선다. 가령 이 '캡슐'은 생존자 모두의 생환이라는 기적을
표상하지만, 그 기적에는 생환 이후 이들 개인이 아무렇지 않게 감내해야 하는 도저한 일상과 그 사이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정신적 외상의 흔적도 선점되어 있다. 재난은 확실한 공적 인증을 받지만, 재난 이후는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며 요동하고
있는 개인의 실존일 뿐이다. 바로 이런 현황을 <칠리안 캡슐>은 기억하고자 한다. 가능한 한 오래.
여기서 집단적인 외상후post 기억상실을
'치유'하려는 노재운식 모험이 뮌하우젠 남작의 허풍을 차용하는가, 아니면 그의 예술적 복구 실험이 브레히트의 소격을 원용하는가를
규정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또 37년간 원기둥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4세기 기둥성자 시므온 the Pillar Simeon의
고행이나, 말년에 호텔 꼭대기 방에 수많은 모니터를 설치해 놓고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하워드 휴즈의 '여행'이 그의 작업
방식과 유사하다해도 이를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물론 작가가 종종 이 모두를 동원하며, 대체로 하워드 휴즈식을 선호하는
양 여겨지긴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이번 전시에서 노재운식 '요법'은 전시장 곳곳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는
<프레임사이즈>를 통해서 그 구체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비릴리오는 전자정보학에서는 정보의 저장이 아니라 정보를 모니터 스크린에 띄우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된다고 적는다.3)
한편, 노재운은 바로 그 모니터 스크린, 곧 프레임 자체가 보다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고 여긴다. 각종 디스플레이가 우리시대의
핵심적인 미디어이자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터페이스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프레임사이즈>는 프레임의 색채, 형태,
크기, 재료를 변형시켜 일종의 프레임풍경frame-scape을 구축한다. 원래 이것은 "영화나 가상현실의 개념이 너무 자의적이고
상투적으로 상용된다는 사실에 착안, 그런 것들에 일시적 제한을 두거나 판단 정지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 순간
멈춤의 틈새를 통해 전시장에 흩뿌려진 <프레임사이즈>들은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의 조합과 배분 그리고 중첩을 통해서
무한연장 가능한 시각적 리듬들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음표화된 프레임들의 선율을 읊조릴 때, 나는 그 '내재율'이
반사(단적으로, 거울)와 통과(예를 들어, 달리는 기차의 창)라는 프레임의 오래된 역할에 기인한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제,
<프레임사이즈>에서는 정보를 띄우는 것보다는 정보를 링크하거나, 비유컨대, 정보를 해킹하는 게 더 중요하다.
재난과 관련하여, 애초에
<프레임사이즈>는 제 국면과 세부들을 재생산하거나 정보의 과잉생산을 부추길 시도조차 않는다. 그 대신 이 작업은
관객들로 하여금 프레임 표면에 반사되는 이미지들을 따라 전시장의 작품을 다음 작품들로 링크 걸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작품들에 내장되어 있는 상이한 아비투스의 서로 다른 층위로 이행하면서, 그것에 자신들의 습속을 얹어보게 한다. 그런가 하면 이동 중
어느 순간, 갑자기, 텅 빈 프레임을 통과한다면! 상상 하기도 한다. 물질의 난반사와 의미의 공백으로 '채워진'
<프레임사이즈>는, 결국, 사람들을 재난영화와 정반대에서 바라보게 하고, 재난 특집방송을 비껴 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스크린 모니터들이 제시하는 결말과 목적을 거부한 채, 사람들은 기꺼이 프레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재난의 풍경
안에서 동요한다. 가령, 우리는 <프레임사이즈>의 이러한 경로를 거쳐 재난 현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현존을 '해킹'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현장을 보거나 보여줄 수 없다. 풍경 속에 뭉개져 있는 식별 불가능한
것들, 또는 익숙한 장면들이 탈락되거나 왜상歪像이 삽입되어 있는 광경 앞에서, 이들이 과연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앙리-피에르 죄디는 우리의 시선에서 미끄러지는 이들의 시선이 어떤 예술가의 시선과 가깝다고 쓴다. 재난의 풍경을 '재현'할
때, 우리가 알 수 없는 풍경의 온갖 상이한 내밀성들 간에 공모를 작동시키기 위해, 시선들의 접합, 상호성 같은 원리를
이용하도록 요구받는 예술가4)의 시선 말이다.
광산 매몰사고는 원근법의 아비투스가 갑자기
무너져 내려 평평해진 재난의 풍경을 가장 극단적으로 제시한다. 이 붕괴의 '시나리오'에서 우리 몸을 격하게 끌어 당겨 현장과의
거리감을 일거에 없애 버리는 것은, 사망자의 숫자가 아니라 바로 거기 생존자가 있다는 소식이다. 산 채로 매장되는 이 끔찍한
'악몽'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가위눌림으로, 급기야 폐쇄공포를 정상적으로 가동시키고 만다. 평상시에 겪는 패닉 상태는
무의식이나 신체가 주는 잘못된 정보의 입력에 기인하기 때문에, 수정된 정보를 재입력하면 조만간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이지만 공황장애로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 반복해서 인지해도 죽음의 공포에 장악되지 않을 수 있다는 치료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생매장의 공포는 그 순간 살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폭증한다. 칠레의 광부들은 풍경이 삭제된 지하갱도에서
영화와 비디오를 보고 화상전화를 하면서 그 시간을 견뎠다고 한다. 이들이 보았던 화면들은 잠들지 못했던 이들이 꾸었던 꿈이자
렘수면의 꿈이 투사된 스크린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이 스크린의 프레임은 <가장 높낮은>의 가장 큰 화면비aspect
ratio를 훌쩍 뛰어 넘을 것이다. 최소한 그것은 지하 700미터 '깊이'는 될 테니까. 죽음과 같은 깊은 잠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 중 하나라는 사실은 대단히 논리적이기조차 하다.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을 보면 밝은
낮 동안에도 짧은 조각잠에 빠져드는 군인들 사진이 나온다. 참호든 그냥 땅바닥이든 이들이 누워있는 곳은 어디나 무덤처럼 보인다.
이 젊은 군인들은 지난밤에 공병대가 지뢰를 철거하고 안전하게 확보해 놓은 통행로를 표시한 흰색 줄 안에서 자고 있다.5)
말하자면 안전하다고 설정된 흰 프레임 안에서 제각기 곯아 떨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잠 속에서 <본생경>을
본다. 아니, <본생경>은 재난에 처한 우리가, 같이 또 따로, 꾸는 꿈이다. 부처의 전생을 다룬 이야기그림인
본생도本生圖와 자기가 생전에 지은 죄가 비친다는 거울(業鏡)의 아이디어를 결합해서 작가가 만들어 낸 이 구조물은, 붉은 색 아크릴
거울과 알루미늄 폴로 조립된 일종의 거울 방이다. 아크릴 거울들은 영화사 100년 동안에 등장했던 다양한 화면비의 프레임들로,
관객들은 거기 비친 자신의 모습과 그 반사된 모습이 다시 좌우 아래의 다른 프레임들로 재반사되는 장면을 사방으로 움직이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거울 방에서 아크릴 거울 표면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우연한 왜곡과 이에 효과를 더하는 붉은 색조로 인해, 관객들은
자신의 이미지, 이미지의 이미지, 무한대 이미지 회오리의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한다.
의식의 공백상태를 채우도록 훈육하는 어른들의
합리적 시간에 저항하기 위해 흔히 아이들은 동일한 놀이를 지속해서 수행한다고 비릴리오는 설명한다. 놀이와 불순종을 막연히
동일시하는 이 아이들의 놀이에 자주 등장하는 소용돌이, 원무, 불균형의 놀이는, 현기증과 혼란의 감각을 증진시키고 이를 통해
즐거움과 쾌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끝도 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공놀이와는 달리, 본 것과 보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몸을 뒤집으며 그 잠깐사이를 상상하는,
전형적인 '이미지 놀이'이다.6) 자신의 전생과 업을 보기 위해, 우선 <본생경>은 어린이 몸으로 되돌아가서 이 익숙한 이미지 놀이에 빠져들게끔 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과거와 미래가 놀이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아이들이 낮에 자신이 보았던 사건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거나, 멀쩡한 어른이 깜빡하는 사이에 찻잔을 떨어뜨리는 일시적인 '간질' 증세로부터 비릴리오는 피크노렙시picnolepsie라는 개념을 도출해낸다.7)
잠들었지만 꿈꾸고 있고 꿈꾸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렘수면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보는 것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잠깐의 부재, 곧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와 관련이 있다. 비릴리오는 보지 않는 잃어버린 순간들인 이 '사이의 시간성entre-deux'을
의식차원으로 억지로 각성시키려는 현대성에 반대하여 피크노렙시의 정상성을 담보하려고 한다. 원래 picno는 빈번한, 자주
일어나는, 이라는 그리스어 접두사라고 한다. 거기에 발작, 마비 혹은 신경발작의 lépsis가 연결된, 피크노렙시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시적인 기억 부재라 번역될만한데, 언젠가부터 이것이 의식차원의 빠른 각성이라는 반대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본생경>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화면비로 조성된 아크릴 거울 표면 위로 반사이동하고, 그 사이의 빈 공간을 통과한다.
그러면서 단순하고 순수한 중단, 실재의 소멸과 재출현, 그리고 시간에서 분리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되고, 이를 통해 현대사회
이미지의 속도가 억압해온 피크노렙시의 역량을 복구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존재하지 않은 것을 필름에
담으려는 영화적 특수효과를 거부하는 대신, 존재하지 않은 것을 그대로 제시하는 초창기 멜리아스 영화의 몽타주를 선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로, 불가능하며 초자연적이고 경이로운 형상들이 파열되는 순간, <본생경>은 영화가
동시대의 본생도이고 스크린이 곧 지금의 업경이라는 '동아시아적' 피크노렙시를 설파하고 있는 셈이다.
기억의 공백을 합리적 이성이 주도하는 개연성
있는 시퀀스로 메꾸려는 대세에 역행하여 그 '사이 시간'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피크노렙시의 기술을 연마할 때, 우리는 매개적 시간의
불안정한 구조를 상용화하여 비로소 다른 누구의 시간도 아닌 자신만의 시간으로 충만하게 된다. <본생경>처럼 다른 개별
작품8)이
나 작업 방식에도 이 기술이 적용될 수 있겠지만, 전시장이라는 공공장소에 그의 작품들이 흩어지면, 이제 피크노렙시는 전시 관람의 한
방식으로 치환된다. 특히 웹이나 영화, 비디오, TV 등에서 콜렉팅한 각종 이미지를 모니터를 통해 상영하곤 했던 노재운의 다른
전시보다, 오브제와 평면, 설치와 그림 등으로 구성된 「목련아 목련아」에서 이 관람방식은 더 현저해진다. 무엇보다 이는 대체로
모니터와 눈을 맞추는 일대 일 감상법과 달리, 시야를 넓게 확보하여 사물들 사이에서 출몰하는 부재의 공간을 다 시점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감각의 층위가 상이하고 재현의 정도가 다르고 설치의 방식이 제각기인 이들 작품은, 전시장 안에서
각각 다른 논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순간의 시간성을 확보함으로써, 진실과 환영, 현실과 외관, 생음과 환청 등의 경계를
모두 용해한다. 1963년에 만들어진 김기영 감독의 영화,「고려장」의 한 장면을 프로세싱해서 프린트한 2011년의
<고려장>은 일종의 이중인화이자 이행의 순간이 겹쳐있는 디졸빙 뷰로, 거기로부터 의미의 다른 층이 불쑥 튀어 나오게
하는 토대가 된다. 거기서 나는 북한 아사자 무덤을 찍은 위성사진이 돌출하는 것을 목격한다. 요컨대, "지옥은 '재현'의 밀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인간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 유사 피크노렙시 감상법은 지옥의 보편성을 벗어나 다른 것을 향하여
그리고 차이를 향하여 전시장을 개방시킨다. 어긋남과 불일치로 인해 벌어져 있는 이 공백 사이로, 마리오 페르니올라Mario
Perniola가 '기회'라고 불렀던 카이로스적 시간, 곧 어느 특별한 순간에 다른 차별화된 정의가 필요한 신적인
관용epieikés9)이 개입한다.
유교에서는 재난에 대한 담론을 보다 포괄적인
재이론災異論으로 푼다고 한다. 재이는 재난과 변이變異의 합성어로, 재난이 가뭄, 홍수, 질병 등 인간에게 직접적인 상해를 입히는
것이라면 변이는 인간을 둘러싼 자연현상의 괴이한 변화를 가리킨다. 재난은 고통이 현실화된 것이지만 변이는 고통의 상황을 예고하는
비일상적인 현상의 출현이다. 이러한 변이가 두려운 까닭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지만 불확실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가져오는
공포심 때문이라고 한다.10)
산 정상에 큰 고리가 걸려있는 풍경들을 그려낸 <산고리 뇌사경mountainring,
braindead-scape>들도, 마치 큰 위기가 도래하기 직전에 땀을 흘린다는 비석처럼, 어떤 변고를 예견하는
자연현상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풍경들은 작가가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발견한 '구멍난 씬scene'들을
콜라주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고리들이 있는 산 풍경을 산수화법으로 단숨에 그려낸 서양화란, 어쩌면 뼈있는 농담일수도, 혹은
적확한 예지일 수도 있겠다. 작가가 거의 자동기술적으로 그린다는 <뇌사경> 연작 중에서도, 특히 이 <산고리
뇌사경>은 산 정상의 고리가 알츠하이머나 광우병에 걸린 사람의 뇌 속에 생기는 구멍을 연상시키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아니, 반대로, 죽어가는 뇌가 산고리를 연상시켰다고 했던가.
어쨌든, 피크노렙시를 겪는 '어린 견자見者',
노재운은 재이를 막고 쫒기 위해서 사진이나 영화가 아니라 회화의 형식을 차용한다. 아마도 이것은 사진이나 영화가 재앙의 순간을
고정시켜 우리 눈이 그 순간을 기대하도록 만든다면, 회화는 재현 과정 그 자체 안에서 또는 추상에 힘입어 유비적인 방식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11)
또 사진이나 영화가 이미 발생하거나 혹은 발생했다고 합의한 재난만을 다룬다면, 회화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변이의 '예언'도
재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수행하는 자동기술적 드로잉은 재이를 예방하거나 축출하기 위해 치루는 의례ritual의
퍼포먼스로도 읽힌다. <산고리 뇌사경>을 전통적으로 가뭄을 그치고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영험한 장소에서 올리곤
했다던 용신제에 비유하자면, 노재운의 '위기crisis의례'는 용의 그림을 그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화룡제畵龍祭보다는 물속에 호랑이
머리나 뼈를 던져 용을 자극 했다는 침호두沈虎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산고리 뇌사경>이 산의 형상을
그리기는 하지만 모사가 목적이 아니라 그림 속에 '현현'된 고리로부터 나오는 비가시적 파장을 통해서 어떤 효과를 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화룡제 등의 여타 용신제와 달리, 침호두는
의례의 대상인 용이 형상화되지 않고 깊은 물속에 잠겨 있는 잠룡의 형태를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용의 형상화가 강화되고 형상이
구체화할수록 화려한 용의 신성은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변해왔다고 하니, 잠룡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그 신성을 훼손당하게
되는 것이리라.12)
불현듯, 이 잠룡은 자주 피크노렙시에 빠지곤 하는 히치콕 류의 스파이를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미션을 완수하라는 명령을 받기
전까지는 '기나긴 잠'을 자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완벽하게 허구적인 신분으로 위장하여 '범속한 가시성'을 획득하게 되는 바로 그
스파이 말이다. 무릇 모든 스파이는 비가시적 존재일 때 가장 쿨한 법이다. 소매치기의 비법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마술적이듯이
말이다. 21세기 지옥세계로 밀파된 우리의 스파이, '하이퍼 소매치기' 노재운의 암약상이 다음 '영화'에서는 어떻게 펼쳐질 지
자못 궁금하다 - 劇終 The End.
1) 이하 모든 인용부호는 작가의 말을 옮긴 것임.
2) 이상길, "탈색된 재난들의 기억 너머", F1 : 재난, 문지문화원 사이, 2011, p.16.
3) 비릴리오, 소멸의 미학, 김경온 역,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4, p. 94.
4) 앙리 피에르 죄디 Henri-Pierre Jeudy, "체르노빌, 재앙의 풍경에 대하여", 이상길 역, F1 : 재난, 문지문화원 사이, 2011, p. 31.
5) 브레히트, 전쟁교본. 배수아 역, 워크룸프레스, 2011, p. 52.
6) 비릴리오, 같은 책, p. 35.
7) 이하 피크노렙시 관련 내용은 모두 비릴리오, 같은 책, pp. 28-83.
8) 노재운과 주고 받은 문자에서 그는 애기봉 프로젝트의 <얼음여왕 Casta Diva>이 이 개념과 관련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9) 비릴리오, 같은 책, pp. 76-77에서 재인용
10)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p. 77.
11) 앙리 피에르 죄디, 같은 책, p. 35.
12) 이욱, 같은 책, pp. 191-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