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정 현(비평)
예술가에게 인식이란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호기심이다. 그것은 과학자나 철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일 것이다. 인식적 물음은 잠든 무의식을 깨우지만, 그렇다고 의식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시 알아내야 할 것 사이에 서 있는 창작자에게 인식적 물음이란 세계에 관한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짐짓 관념적이고 시학적인 관조처럼 들리는 이 행위는 사실 창작자에게는 고통의 시간일 수밖에 없다. 예술가에게 작업이란 꼬리를 무는 물음의 사색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뒷짐을 진 채 세상을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다.
동시대미술이 소비와 오락으로 치우치고 있는 가운데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의미가 과거에 비해 퇴색된 것이 사실이지만, 전시를 경험하는 시간이 꼭 소비를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간은 현실과 다른 세계, 다른 공간을 체험하는 ‘시간 밖의 시간’이자 물리적 시간 안에서 길러 낸 ‘시간 안의 시간’이기도 하니까. 우순옥의 <잠시 동안의 드로잉>은 문화 활동마저 생존의 목적에 따른 요구라고 강조하는 생산적 시간에서 조금 비껴난 사색의 시간으로 초대한다. 이처럼 비껴난 시간에 (우연히) 초대된 사람들은 잠시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낯섦’은 인식을 위한 통과의례이니까. 이제 여러분 역시 인식의 경계를 어슴푸레하게나마 다시 그어볼 시간과 마주한 것이다. 한편 노재운의 <목련아, 목련아>는 장르 영화적 상상력으로 생산된 영화적 시공간을 재해석한 ‘혼성적 시공간’을 제안한다. 그의 어두운 시공간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마치 조립완구키트의 포장을 열었을 때의 감정과 유사할 것 같다. 모든 조립완구에 그만의 질서가 있는 것처럼 노재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동적인 관객에서 나아가 스스로 조립완구를 완성하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간 밖으로 미끄러지기
우순옥에게 작업이란 빛을 찾는 과정이자 빛을 매개로 교감의 경험을 나누려는 시간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빛은 사상을 품고 있는 거대한 서사를 위한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에게 ‘빛’이란 재료는 역사 이전부터 존재하는 진리이자 아직까지 그 고유성을 지키는 귀한 대상이다. 그에게 빛의 가치란 생명에 대한 경애이며 예찬이고 잃어버리고 잊혀진 것들을 다시 불러오려는 몸짓이다. <잠시 동안의 드로잉>은 언어와 이미지, 사물과 기억, 공간과 움직임 그리고 빛과 온도에 관한 전시다. 전시는 차가움으로 시작된다. LED 텍스트 작업 <우리는 모두 여행자>가 관객을 맞는다. 바로 왼쪽 벽 위에 스스로 공전하는 시퍼런 달 <그곳>이 떠 있다. 이 여행이 시간 밖의 시간을 향하고 있음을 지시한다. 시간 밖의 시간이란 과거-현재-미래의 연대기적 방향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형광등을 단 <커플 트리> 두 그루가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비디오 설치 작업 <12편의 신기루>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펼쳐진다. 작가가 평소 즐겨 보던 영화 중 12편에서 발췌한 일부 장면을 반복 편집한 영상이 자신만의 공간에 놓이고 그 사이로 소박한 화분들이 모니터 주변에 자리 잡는다. 이제 빛은 기억을 담는다. 12편의 영화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소멸하는 과정을 장면으로 옮긴 생명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멀게는 장 콕토의 <시인의 피>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에 이르는 이 영화적 여정은 12편의 이미지와 소리(말)의 섞임에 의해 낯설면서도 익숙한 설명할 수 없는 정감을 만들어 낸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12편의 신기루>는 나지막이 생명이란 시간의 불가역성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소멸하지만 예술은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저항하는 시적인 몸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듯 이 기억의 정원에 초대된 사람들은 영화와 영화 사이,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맴돌게 된다.
12편의 영화적 여정 중에서 유독 샹탈 애커만의 <갇힌 여인>의 발췌된 장면은 내게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5권 《갇힌 여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는데, 욕망에 관한 심리적 불안감과 모호함을 다루는 장으로서 자아와 또 다른 자아 사이의 심리적 묘사가 특히 인상적이다. 우순옥은 <갇힌 여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목욕 장면(남자가 욕조에 있고 욕조 옆의 불투명 유리로 된 벽 건너편에는 여자가 샤워를 하고 있다)을 발췌한 후, 이 장면에서 뒤샹의 <큰 유리>를 떠올렸다고 한다. 영화 속 장면처럼 결코 완벽한 하나가 될 수 없는 남과 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은 그저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며 애무하는 행위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프루스트의 원작 속 인물들의 관계가 가진 모호성이 애커만의 영화에서 다시 우순옥의 관점으로 이동하는 연속적 탈주선이다. 프루스트가 창조한 인물 알베르는 프루스트 자신의 반영이었고, 여자 알베르틴은 알베르의 반영이었다. <갇힌 여인>의 여주인공 아리안(ARiANE)은 애커만(AkERmAN)의 반영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마르셀 뒤샹의 이름(MAR-CEL)에서 신부(MARiee)와 독신자(CELibataire)로 파생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프루스트에서 애커만으로, 이어서 뒤샹에서 우순옥으로 이어지는 이 여정의 상상력은 연속적으로 탈주선을 타고 이행한다. 우순옥의 작업에서 이와 같은 이행의 탈주선은 언어와 이미지, 이미지와 조형 작업 그리고 공간과의 조우로 끊임없이 상호적으로 이어진다. 관객은 우순옥의 세계 안에서 어쩌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묻는 것, 시간과 공간의 심리적 위상을 되묻는 것이야말로 인식의 첫 걸음이니까.
시간에 관해 다시 묻기
노재운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자신만의 조형 언어와 구조를 실험하는 작가다. 그는 설치작업이란 용어 대신 ‘인터페이스’란 개념을 적용하는데, 이 개념은 크게 두 가지의 태도를 의미한다. 하나는 전통적 미술 개념에서의 완성이 아닌 매개체로서의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디지털시대에서의 인식의 태도를 지시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은 물리적 시공간 대신에 정보를 수집해 세계를 인식하기 때문에 인터페이스란 동시대적인 인식의 구조로 해석할 수 있다. 노재운의 조형 작업은 쉽사리 읽히거나 미학적인 총체적 쾌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그의 세계는 영화적 상상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영화의 도상학적 재해석이 아닌 영화라는 허구적 시공간의 시스템을 분석하고 이를 자신만의 조형 언어 문법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목련아, 목련아>는 이중적인 의미로 읽힌다. 의도적으로 키치적인 느낌을 부여한 듯한 이 제목에서 서글픈 초봄의 목련꽃을 연상한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목련은 불교 경전 《목련경》에서 따온 것으로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는 목련존자의 내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지옥의 공간은 어떠할까? 사실 전시에서 곧바로 지옥을 연상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는 지옥을 재현하지 않고 지옥을 재현했던 1960~70년대 고전 아시아 공포영화를 참조했다. 재현의 전통을 따르는 헐리우드 영화의 지옥 대신 그가 참조한 동양영화 속 지옥은 묘사보다 심리적 상태를 주목한다. 작가는 이런 표현의 차이를 불교 또는 유교적 가치관의 반영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노재운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조형 언어 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프레임 사이즈인데, 이는 영상을 담는 구조(특히 필름의 크기와 화면을 잡는 앵글)가 본질적으로 지역의 문화적 가치관에 따라 프레이밍의 차이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본생경>은 지옥에서 죄를 비추는 거울 ‘업경’의 개념을 100년의 영화사에서 명멸한 프레임 사이즈를 자신을 비추는 붉은 빛의 거울로 공간화한 작업이다. 여기서 프레임 사이즈는 문화적 시공간의 차이가 생산한 인식의 틀의 형태일 것이다. 그의 인터페이스는 들뢰즈가 말한 쁠랑(Plan)에 관한 해석처럼 영화적 화면의 지리 정치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며, 동시에 영상의 본질인 이미지의 움직임과 소리의 역학 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이다.
아트인컬쳐(12월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