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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시각성: 노재운의 작품과 겉면 보기
테오도르 휴즈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노재운의 작품에서 우리는 역사와 시각적인 것 사이의 연계를 대면하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연계는 시각적 깊이 내지 퍼스펙티브적 깊이가 과거로 물러가거나 현재 속으로 이동하고 미래로 투사되면서 역사와 연관되어 왔던 여러 방식들이 파열하게 되는 것을 담고 있는 연계이다. 역사적인 것은 이제 하나의 겉면이 다른 겉면들과 공존하는 형태로 일련의 매개된 겉면들로 등장한다. 일례로 「애기봉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그 공간을 영토화하고 있는 ‘애기봉’이라는 이름에도 남아있는 것과 같은) 소박한 여주인공의 이야기이나 (1636년 병자호란의 청나라 군대의 침략과 같은) 외침(外侵)에서부터 한국전쟁(1950-53)의 참화와 민족 분단을 거쳐 개발론적인 미래상(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공장 이미지)으로 이어지는 그러한 역사의 운동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겉면들의 어떤 기억만이 등장할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노재운은 아무리 변증법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떻든 총체화의 행렬을 해체한다. 「애기봉 프로젝트」는 역사 자체가 시각적 질서와 결합되는 방식들을 펼쳐 보여준다. 특히 어떤 퍼스펙티브 주체가 시각적 질서 앞에 내세워지게 되어 있어서 이 시각적 질서가 물러서거나 전진하면서 시간과 공간 속에 투사하게 되며, 그런 형태로 시각적 주체를 소환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애기봉 프로젝트」나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 대면하게 되는 것은 어떤 시각적인 역사는 아닌 셈이다. 그것은 역사와 이 역사에 수반되는 폭력이 역사와 시각성 간의 관계를 통해서 진행되는 방식들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노재운의 작품이 자연화된 시각방식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브리콜라쥬에 호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비디오, 영화의 장면들, 위성 사진, 그래픽, 오브제, 그림, 포스터, 설치 등을 망라하고 있는) 이러한 이미지의 재분배가 우연적인 것 그 자체를 찬미하는 쪽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우발성은 폭력/전쟁과 이에 저항하는 열린 상태의 전복적 몸짓, 이 양자를 모두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으로서 대두한다. 폴 비릴리오와 여러 논자들은 영화의 시각 체제(scopic regime)와 현대 전쟁술의 특징이라고 하는 이동성(mobility)과 표적 조준의 테크닉 --추가한다면 여기에 수반되는 훈육 구조들--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이 말하는 그 긴밀한 연관성은 우리가 「총알을 물어라!」에서 보는 것처럼 이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응시를 통해 우발적인 것을 근절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본다는 것은 파괴한다는 것”을 모토로 하는 이 시각 체제 아래에서 우리는 이 모토에 목적어를 하나 더 추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다는 것은 우발적인 것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노재운의 「총알을 물어라!」가 우리에게 무언가 던져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우발적인 것의 불안이 전쟁과 영화의 시각 체제를 운동하도록 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데에 있다.
「총알을 물어라!」는 ‘한국 전쟁’에 관한 미국의 영화적 상상에 얽혀있는 역사를 지우는 데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또한 미국 전쟁 영화를 떠받치고 있는 표적 조준자/조준 표적의 관계를 뒤집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물론 어느 수준에서는 이러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기는 하다. 표적 조준자--전투기 조종사 내지 ‘코리아’를 대상화하는 시각 체제--의 이미지는 생산/상영의 순간 항상 이미 응시가 바로 그 응시하는 자신에게로 되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를테면 퍼스펙티브 주체, 원거리에서 작동하는 역사 주체, 폭탄을 투하하는 주체는 그 자신에 항상 이미 어떤 시선의 객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도곡리 다리>와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던 1950년대 미국 영화관이 그러한 경우였다고 한다면, 이제 관건은 관객이 폭탄을 투하하는 주체의 영화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방식을 중단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어떻게 보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는 것을 보는 그 방식을 중단시켜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서를 거꾸로 향하게 한다는 것, 표적을 조준하는 자를 조준한다는 것도 이 폭력의 시각 체제, 말하자면 영화 관람과 총체화하는 보기 방식의 동일화를 지탱해주는 역사를 해체하는 데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다. 이점은 작가가 종종 끌어들이곤 하는 조지 루카스의 <스타 워즈>에서 이미 리허설로 예행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스타 워즈>에서 ‘데스 스타’의 폭파로 이어지는 일련의 폭격 장면들은 상당 정도 <도곡리 다리>의 유명한 폭격 장면에서 끌어온 것인데, 미국의 한 관객으로서 볼 때 <스타 워즈>는 어디까지나 한국 전쟁과 관련된 가상성의 한 가지 확대판에 불과한 것이다.
작가의 「총알을 물어라!」는 우리에게 폭격기 조종사와 그 조종사의 표적 응시에 관련된 이미지가 얼마나 불안정하며 애초부터 불안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응시의 시선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분명 폭력을 신성한 것으로 인준해 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똑같은 방식으로 시선을 거꾸로 향하게 한다는 것, 시선을 바로 그 시선의 당사자의 위치와 함께 대상으로 포착한다는 것도 응시의 코드를 묵인해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노재운의 브리콜라쥬는 정치적인 것, 폭력, 역사를 응시 자체의 구조적 불안정성 속에 자리잡게 하고, 그럼으로써 주체를 그것의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파괴의 행동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표적에 거리를 취하도록 할 수 없으며, 폭력 가해의 트라우마를 이완시키면서까지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그 기계 보철 장치(補綴 裝置)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노재운 작품의 관람자는 마치 어느 한 순수한, 탈육체화된 형태의 보는 행위가 높은 곳에서 (이를테면 비행기 속에서나 스크린 앞에서) 취할 법한 방식으로 ‘본다’는 것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맥락과는 달리 노재운의 작품에서 어떤 촉각적인 비전을 대면하게 된다. 하나의 겉면이 다른 겉면과 맺는 상관 관계로서 신체가 재도입된다는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작가가 최근작에서 피부(Skin)에 관심을 쏟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말하자면 폭력의 시각 체제가 타자적인 것, 이질적인 것이라고 해서 잘라내는 바로 그것을 접촉하면서 우리는 본다는 것이 곧 물질적이게 되는 그런 방식을 접하게, 접촉하게 된다. 우리는 “총알을 깨문다.”
「여성의 정체」, 「보드리야르 인 서울」에서 작가는, --마르틴 하이데거, 매리 앤 도운, 수전 스튜어트라면 다른 방식으로 지적했겠지만-- 자신이 정의하는 바의 시각적 현대성에 픽셀, 화소(畵素)를 도입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어떤 압도적인 시각적 현전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축소화, 이 양자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양자의 관계는 클로즈업과 극단적인 롱샷의 관계와 비슷하다. 노재운의 작품에서 우리는 미디엄 샷에서부터 클로즈업으로 줌인되면서 점점 더 다가서게 되며, 이와 함께 이미지는 화소로 해체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언가 젠더화된 응시, 로라 멀비가 말했던 그 시각적 쾌락의 중지를 경험하게 된다. 클로즈업(close up)을 넘어서 화소로, 이를테면 ‘클로지스트 업’(closest up)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주체가 객체에 던지는 시선이나 객체가 ‘되돌려 던지는’ 저항적 시선, 양자를 모두 불허한다. 여기에서 주된 관심사는 어딘가 다른 데를 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동은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 건물의 블록, 즉 화소를 향하고 있으며, 정확히 말하면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성을 물질성의 한 형식으로 대면하게 한다. 이 물질성은 ‘월드 와이드 웹’을 거쳐 지구적으로 순환하는 이미지들을 구성하며, 월드 와이드 웹의 영향권을 이루는 그 가변적인 포맷들/테크놀로지들 모두를 구성하는 물질성이다.
단일한 사이즈로 되어있고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차 뭉개지는 화소들은 우리가 이로부터 멀어질수록 욕망의 관념들과 연계되는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위계질서가 어떻게 창조되어 있는지, 또 명확하다는 것, 초점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화된 코드를 거치면서 어떻게 그 ‘보기’ 방식과 불가분하게 연관되는 가치의 역사 속에 장착되는지를 볼 수 있게 된다. 작가가 ‘보편적 시네마’(universal cinema)를 제시하는 방식은 특수자를 소거해버리는 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특수자와 대비되어 보편자를 특권화하는 어떤 몸짓, 에티엔 발리바르가 말했듯이 보편자라는 관념이 바로 이 관념의 타자인 특수자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주는 그러한 몸짓으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내가 보기에 작가는 보편자 관념을 대단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열려있는 상태의 비위계적인 상관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독자적 개별성들과 이 독자적 개별성들로 이뤄진 그물망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런 상관 관계는 오직 이 독자적 개별성들이 (마치 하나의 이미지 형식으로서 사라지는 화소들처럼) 얼마나 쉽게 지워질 수 있는지를 기억함으로써만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노재운의 개입에서 우리는 ‘코리아’가 다중적인 역사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역까지도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지구적인 이미지 순환 속에 있으며, ‘코리아’가 이 이미지 순환 속에 장착되어 있는 수많은 장소 중의 하나임을 볼 수 있게 된다. 작가의 작품 상당수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공간의 남북 분할도 그 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작가는 우리에게 이미지 순환의 역사 하나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이미지 순환의 역사에서 여러 상이한 형식들로 지구적 차원에서 한국 전쟁을 연장하고 있는 시각 체제 상에서 1950년대와 연루되었던 역사가 그것이다. 「보편적 시네마」를 통해 이 시각 체제의 해체를 노리는 노재운의 프로젝트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면, 그 주된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을 포함하면서도 지구적 군사화와 이를 동반하고 있는 보기 방식, 여기에 새겨져 있는 불안을 드러내 주는 방식으로서 이 「보편적 시네마」는 이른바 ‘국경’, 민족적 경계의 관념을 훨씬 뛰어 넘는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