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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알을 물어라! Bite The Bullet!, vimalaki.net, 2008 |
스킨에서 유니버설 시네마로 : 열린 미래를 위한 노재운의 수호
김희진(기획, 비평)
노재운은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지각과 인식의 체계를 고민하는 작가이다. 우리는 글이건 이미지건 대부분 ‘눈으로 본 것’들을 가지고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체계화해 지식을 구성하며, 거기에 기초한 가치체계가 생기면서 이 가치체계에 반응하여 자신의 시각, 즉 가치관(가치를 보는 자세)을 세운다. 그는 일체의 보이는 것들에 점령당해 조작, 축소, 오도, 종속되는 우리의 사유체계와 사유방식을 염려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일체의 ‘보이는 것’들이 ‘보는 법’을 강요한다는 데서 발원한다. 그 ‘보는 법’을 따르지 않으면 ‘상식’을 공감하지 못하며 지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지식의 대오에서 낙오되어 결국 ‘공유’의 장에서까지 누락된다. 이 상황은 온/오프라인, 공공/사적 공간, 도시/자연 어디에서건 마찬가지이다. 특히 한국같이 땅에 비해 사람이 많고 더구나 밀집되어 있으며 국내외 정세도 복잡하게 얽혀있고 따라서 숨가쁘게 변해가야 하는 곳에서는, 개인에 대한 보이는 것들의 강요가 더욱 노골적이고 그 강도도 강력하며 변신의 속도도 빠르고 방식도 전방위적 이다. 아침부터 안방을 점령하는TV 드라마부터 날씨 한번 알아보려다 쏟아져 들어오는 네이버 실시간 뉴스, 아우성치듯 치장한 개인 블로그, 수시로 날라오는 문자메시지까지 중재된 지식mediated knowledge들이 개개인의 ‘눈’을 포위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집단의 상식이 되어 개개인의 생각을 잠식한다. 별다르게 독특한 생각을 지니지 않은 일반인들에게조차 ‘눈’은 우리의 개별성과 집단적 상식이 각축을 벌이는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노재운의 작업은 이미 2004년 개인전 ‘스킨 오브 사우스코리아’서부터 이미지가 결정하는 정보와 지식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었다. 인터넷에서 퍼온 수많은 이미지 데이터들에서 동시대 한국인들의 소위 상식적 가치관이라는 것을 주도적으로 형성해 온 이미지정보들을 선별해 기호로 단순화시켜 한국의 ‘스킨’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1) 그 스킨의 매체성과 스킨을 도출하는 작업방식이 당시 한국의 진지한 미술인들에게 너무나 첨단적이고, 2) 스킨의 도상이 시각적으로 너무나 매력적이며 3) 스킨의 내용이 한국미술의 강한 사회정치적 풍토가 희구하던 대안적 정치성에 너무나 적절해 보였던 터에, 그만 우리 미술계에 노재운 작업 ‘보기’를 힘들게 하는 주요 필터 몇 가지가 형성되고 말았다.
우선 작업방식에 지나친 의미를 두는 필터. 노재운은 인터넷에서 스틸, 동영상 이미지를 퍼다가 포토샵, 프리미어 가공을 해서 온라인 상에 소개, 유통되는 파일작업을 주로 한다. 전자매체만 썼다고 미디어아트가 되는 줄 알았던 열병이 지나간 다음이라, 더 이상 노재운 작업에 디지털 아트라는 범주를 매기고 프리미엄을 두는 경우는 없다. 대신 디지털 매체의 정치, 경제, 제도적 함의를 일컬어 미술의 독창성 originality, 작가권위 authorship, 미술계 제도 art system 질서를 파열하는 탈권위적이며 반자본적이고 열린 형식이라 평가한다(박찬경, ‘디지털 아트의 아날로그 미학’). 매우 유효한 가치임에 분명한 이 형식논의는 하지만 계속 그의 작업방식에서만 의미를 읽으려 하는 일종의 ‘오타쿠 신화’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우선 매체 상으로만 반박하자면 노재운은 이 시점까지 웹 작업 뿐 아니라 평면 그래픽, 비디오, 오브제, 사진, 그림, 텍스트, 포스터, 설치, 심지어 야외 조형물까지 다양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업방식도 웹과 컴퓨터의 폐쇄순환로에 갇혀만 있는게 아니라 거기서 일차적으로 도출한 스킨과 개념들을 응용, 확장하는 후속과정에서, 현장서 사진도 찍고, 텍스트도 쓰며, 스킨의 원형적 패턴을 포스터로 뽑아 공간구조물도 만들고, 조형물을 만들어 하늘에 띄우기도 한다. 그는 원래 그림을 잘 그리는 회화과 출신 작가로서 한때는 꽤나 야성적인 비디오를 만들었던 경험도 있다. 그에게 웹은 가장 직접적으로 일상을 점유한 ‘눈’의 점령자로서 강력한 효과를 파급시키고 있는데 반해 개입할 구석이 많고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작업현장일 뿐이다. 나이브한 아마츄어의 선택이 아니라 X세대의 쿨한 현실주의적 선택이다. 이 가능한 현실적 선택 내에서 노재운은 수 만개의 사이트를 드나들고 수 백 편의 영화를 훔쳐보며 시각 정보를 재단하고 순서를 바꾸고 픽셀을 조작하고 끼워넣는 식의 지극히 수공적이고 아날로그적이며 고전적인 장인정신으로 작업한다. 가장 최근의 “총알을 물어라!”(2008)는 그래서 더 이상 단발성 스킨이 아닌 이렇게 편집한 동영상들이 책의 챕터처럼 구성되는 ‘웹 퍼블리싱’형태로 도출되었다. 총 12개의 장과 10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는 특히, ‘눈’의 점령을 보조하는 ‘귀’의 점령에도 예민해진 작가가 특유의 이미지 조합에 각종 음향과 영화 대사, 녹취록의 조합을 병치시키고 있다. 사운드와 이미지의 관계도, 단순히 종속적인 상태에서 효과를 배가시키는 사운드트랙부터(5장 ‘The First Dog Fight’) 이미지를 주도, 압도하는 앰비언스 사운드(9장 ‘In a shattered mirror’), 이미지와 충돌하면서 파라 텍스트가 되는 대사(10장 ‘Blind Game’의 #2 ‘You can’t handle the truth’), 결국은 이미지 없이 단독 주도하는 대사(4장 ‘General’)까지 다양하게 변형되면서 노재운의 ‘눈’에 이은 ‘귀’에 대한 탐구의 확장을 예견하고 있다.
다음은 노재운 작업의 도상이 대변하는 그의 작가적 태도와 도상의 서술에 지나친 의미를 두는 필터. 이는 2)와 3)을 지면 관계상 종합한 견해들로서 전혀 반대의 양극화된 필터를 생산해 내었다. 2)는 가령 ‘노재운 류의 작가들은 동시대 징후들의 표피를 스캐닝하고 그 징후들을 가시화시키며 사회를 데코레이팅하는 주름 생산자들’이라는 식의 견해이다(김장언, ‘바로크적 시나리오’). 그와 반대로 3)은 노재운이 인터넷 하이퍼 내러티브에 개입하여 특히 ‘정치적인 파국’의 이미지들을 편역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가시화하고 나름의 질서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견해이다(문영민 ‘노재운-하이퍼 내러티브에의 개입’). 여기서 2)의 견해는 2004년 노재운의 첫 개인전에 대한 리뷰글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유효한 지적이었겠지만 이후 지속되어 온 노재운의 작업선 상에서는 호소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초기 견해가 노재운 작업을 마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프로토타입 디자인 계열 작업으로 보게 하는 필터를 남겼다. 그러다보니 이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노재운 작업은 비록 ‘비판적 거리를 둔 만화화, 캐리커쳐화, 희화화’ 작업이긴 하나 작가의 공들인 선별과 주관적 편집을 거쳤고 특히 정치적 소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미적 요소와 정치적 소재가 상호오염되는 생산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라는 3)의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3)의 견해에서 작가의 주관적 개입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전제를 빼고 본다면 노재운에 대한 핵심가치는 정치적 소재를 새로운 그릇과 자세로 담았다는 것만 남는다. 이 필터는 노재운에 대한 소재특화적인 예민함을 부각시키고 그가 가상현실에서 노는 인터넷 키드가 아닌 비현실화된 한국의 사회정치현실에 개입적 자세를 지닌 작가라는 중요한 층위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그럼 2008년의 안양 도심상공에 떠올랐던 그의 마젠타볼이나 ‘저 멀리 스카이섬 너머로 한 죽은 남자가 어떤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나는 보았네..’라는 텍스트를 작가가 직접 낭독하기도 한 ‘31챔버’ 같은 일련의 인터페이스 설치작업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마젠타 프로젝트에 이어 동두천에서 “총알을 물어라!”를 작업하면서 노재운은 지나친 정치화를 경계하듯 비로서 그의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발언하였다. 그는 우리 삶의 존재론적 상황과 인식, 지각체계를 장악하는 설정 자체를 ‘정치적’이라기 보다는 ‘영화적 cinematic’으로 본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도 작용했겠지만’ 그는 편협하고 단순한 방식을 쓰는 국내 정치적 설정이 유난히 거슬렸고, 그 무력화 방안으로 이미 영화적인 현실의 가상성을 증폭시키거나 SF적 미래 상상을 참조하는 스킨작업을 했었다. 그러나 설정과 이에 대한 파열적 설정이 이미 50년 이상 혼재해온 동두천 같은 곳에서는 또 다른 가상성을 지향하는 파열적 스킨은 무의미하다. 문제는 파열적 설정이 거대한 자본과 군대, 우주과학기술을 동원한 실제 현실이 되면서 이미 미래에 대한 모든 상상가능한 설정을 추월해 버렸다는 점이다. 지금 이 시점에도 현재 설정은 빛의 속도로 계속 미래에 대한 상상과 지각, 인식체계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노재운은 이제 도상의 내용을 커멘트하던 스킨 대신 도상 보는 법을 강요해온 서술의 구조를 재구성한다. 서술의 구조적 설정을 픽셀단위로 분해하고 편역하여 보편적인 서술적 원형만 남기는 ‘유니버설 시네마’작업이 그것이다. “총알을 물어라!”에서 시도된 노재운의 유니버설 시네마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수호하고자 지각과 인식에 바리케이트를 치는 작가의 노력이다(김희진 ‘노재운과의 대화 및 작업노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