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경 (작가/미술평론)
1.
미술에서 어디까지가 아날로그이고 어디서부터가 디지털인지는 구별하기 어렵다. 단지 아이디어 단계에서 마우스로 스케치를 할 수도 있고, 손으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되 관객은 모니터로만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구분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별 의미가 없다. 백남준의 비디오작품 중에는 컴퓨터로 합성하거나 편집한 동영상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백남준의 작품에 ‘디지털 아트’라는 모자를 씌우는 것이, 그의 작품의 특별한 가치를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많은 미술가에게 컴퓨터의 사용은 누구나 쉽게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며, 고급 전자기술을 사용한다고 해서 앞서나가는 미술가로 비춰지는 시대는 예전에 지났다. 최소한 현장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에게는 그렇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미술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구분은, ‘어려운 미술’을 편리하게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책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하다못해 손으로 원고지에 쓰다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글을 써도 글의 내용이 바뀌는데, 시각예술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이디어 스케치이건 최종적인 작품이건, 컴퓨터와 인터넷은 미술작품제작에 다양한 방식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소위 ‘미디어 아트’나 ‘설치미술’을 하는 나 자신도,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는 시대에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 돌아보며 놀랄 때가 있다. 우선 새 작업을 구상하기 위한 리서치 단계에서 인터넷 통신망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상당량의 흥미로운 정보를 다운 받을 수 있을 시간에, 예전 같으면 전화번호나 하나 달랑 알아내고 말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가끔씩 해외 전시에 초대되면, 포트폴리오 파일을 메일로 전송하고 전시절차를 이메일로 협의하면 된다. 이것은 남들도 다 하는 이런 ‘행정적’ 편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전에는 작가들이 리서치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인터넷이 생활화된 된 지금 이제 웬만한 작가들은 작품 구상단계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조사를 하며, 그러한 조사가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예는 작은 것이다. 디지털 환경은 작가 작품의 장르 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컴퓨터를 주요 작업도구로 이용하면 작업실에 소요되는 경제적인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농담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미술가들이 미디어아트나 디지털 아트로 업종을 바꾸는 실질적인 동기가 여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캔바스에 그림을 그리려면 작업실이 있어야하고, 조각을 하려면 더 큰 작업실이 있어야하며, 그림과 조각을 많이 하다보면 작업공간은 너무 좁아진다. 대도시에서는 부동산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팔리지 않는 작품을 쌓아두기 위해 대형 작업실을 유지하는 것 보다 컴퓨터 한대 놓고 사진이나 비디오를 편집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물론 이러한 업종전환의 매력은, 회화나 조각같은 전통매체 보다 작품을 보는 사람이 훨씬 많고, 더구나 젊을 수 있다는 기대와 맞물린다.
예상하다시피, 동시대 미술가들은 현대음악가나 현대시인처럼 극소수의 관객에 익숙하다. 관객의 수 보다 수준이 더 중요하고, 좋은 관객이 좋은 평가를 내린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관습적인 진실이자, 실은 일종의 위로이다. 어떤 미술가도 많은 관객을 거부하지 않으며, 나름대로 어렵게 만든 작품을 가족과 친구들만 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관객에 대한 체념이 일상이 되었을 뿐이지, 관객에 대한 기대, 아니 일종의 망상(혹시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피카소나 마그리트처럼 블록버스터 전시를 하게 되지 않을까?)은 무덤에 갈 때까지 추호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출근시간에 문 열고 퇴근시간에 문 닫는 갤러리에 도대체 누가 맑은 정신으로 온단 말인가? 더구나 대중은 휴식과 재미를 원하고, 심각한 미술가는 피곤한 생각과 예민한 정신, 고급 취미와 문화적 대화, 게다가 교양과 자발성 등 현대 대중이 싫어하는 것만 원한다. 비디오, 디지털이미지, 웹 등은 이러한 불행한 상황에 처한 작가들에게 뭔가 희망을 주는 것 같다. 컴퓨터만 켜면 볼 수 있는 미술, 클릭하면 넘어가는 미술, 바탕화면에 깔아둘 수 있는 미술, 덧칠하고 휴지통에 넣어버릴 수 있는 미술, 음악도 나오고 게임처럼 놀 수 있는 미술 등등.
이런 얘기는 매장 유지 부담이 없다는 인터넷 쇼핑몰 사장의 말처럼 들리겠지만, 또 잘 파는 화가들이 들으면 웃을 것이나, 예술가의 장삿속이야 원래는 단순하고 소박한 법이다. 작업실 문제나 관객의 접근성 문제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미술의 모든 동기는 물론 아니다. 사실 더 한심한 동기도 있다. 디지털이 더 멋있고 새롭게 보여서 변화하는 경우이다. 수많은 ‘예술사진가’들이 19세기 회화보다도 보수적인 미학을 내세웠듯이, 실제로 ‘디지털 아트’ 바람이 처음 불 때에는 20세기 초반의 미술보다도 훨씬 보수적인 경우가 많았다.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션’같은 프로그램으로 ‘디지털 드로잉’ 또는 ‘디지털 판화’를 제작하는 것은, 20세기 초에 마치 사진으로 유화 흉내를 내는 것과도 비슷했다. 새로운 매체가 지난 매체를 모방함으로써, 새로운 매체로 과거 예술의 지위를 얻으려는 허망한 노력은 이미 여러 번 반복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디지털 아트’ 작품들은 인상파 화가들보다도 과거로 더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인상파야말로, 아날로그 시대의 디지털 색보정 기술을 예견했는데도 말이다.
3.
매체는 새롭지만 그 권위는 과거에 기대는, 앞서 말한 경우와 반대 경우를 생각해보자. 미술계 전문용어로 ‘매체필연성’이란 말이 있다. 유화는 유화다워야 하고, 설치미술은 설치미술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디지털 미술은, 디지털 문화의 성격에 필연적인 관계를 지녀야한다. 우리는 흔히, 디지털 환경이 집중보다는 분산의, 지속보다는 단절의, 일방통행보다는 쌍방통행의 문화적 행위를 조장한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전시장에 고정되어있는 사물로서의 미술작품은 관객의 집중적인 감상을 전제하여 만들어졌으며, 관객 자신도 작품에 몰입하고 싶어서 미술관을 찾게 된다. 이에 비하여 전자통신망의 환경에서 몰입을 요구하는 것은, 시장통에서 명상을 하라는 주문과 같을 것이다. 또 전통적인 미술작품이 액자와 좌대, 또는 미술관의 벽을 통해 관객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면, 컴퓨터나 전화기 모니터의 이미지는 오히려 유저의 손끝에 의해 그 생존이 결정된다.
과거에 사진, 영화, 비디오가 전위적 작가들의 마음을 흔들었듯이, 이러한 신기술에서 오히려 해방의 에너지를 발견하는 작가들이 생겨나게 된다. 미술의 희박해진 권위에 대한 향수에 젖는 것도 미술가의 버릇이지만, 그러한 탈권위를 찬양하는 것 또한 미술의 자랑스러운 전통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진 웹 미술가 ‘장영혜중공업’(http://www.yhchang.com)이나, 주목할만한 신인작가인 노재운의 http://vimalaki.net 과 같은 사이트를 가보면, 이 같은 탈권위의 미학, 열린 형식, 파열의 감각에 기초해서 성공한 작업을 만날 수 있다. ‘장영혜중공업’은 화면에 번갈아 나타나는 문구의 매우 빠르고 리드믹한 전환을 통해 아날로그적인 ‘지속성’을 매순간 폭파한다. 노재운은 인터넷에 떠도는 저화질 이미지의 파편들을 끌어다 쓰면서 독창적 예술가라는 관념을 보란 듯이 비웃는다.
4.
디지털기술이 더 발달하면, 옛 명화를 완벽하게 복제하는 색채와 기법분석, 프린트 기술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해, 디지털기술을 통해 아날로그를 재현하고자하는 욕망을 표현할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내 그림’ 파일에 저장하는 것은, 빛바랜 사진첩을 열어보는 회고의 재미를 빼앗아갔다. 사진 찍기 위해서 보는 시대, 좋은 이미지가 되기 위해 살을 빼는 시대에는, 물리적 접촉에 대한 공포와 기대가 동시에 증가한다. 육체의 직접성, 자연의 생기, 지속의 느낌은 두려운 대상인 만큼, 즐거움의 원천이다.
'장영혜중공업’이나 노재운이 조립한 디지털 데이터가 흥미로운 것은, 이들 역시 이런 의미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한다는데 있다. 장영혜의 작업에서 그 대단히 육체적인 리듬감을 빼면 재미없을 것이다. 노재운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표면적이어서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하며 때로 기묘한 회고정서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작업을 잘 들여다보면, 이들이 어떤 면에서는 디지털문화를 은근히 전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쩐지 디지털문화에는 어떤 맹목적인 경향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뭔가, 논리와 효율의 승리를 강요하는 것 같다. 나아가서는 자본이 우리의 일상에 날로 섬세하게 침투하는 양상이, 이미 한계상황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