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 오브 사우스코리아_노재운 전 (6/10--6/27, 인사미술공간)

SSKR, IMZ, 2004
노재운 전 (6/10--6/27, 인사미술공간)

이선영(미술평론)

화살표같기도 하고 비행기 같기도 한 도형을 따라 전시장에 들어서면 2-3cm 정도의 작은 정방형 두개가 붙어있다. 파랑과 빨강, 나뉘어진 태극 무늬가 하나의 픽셀 구조로 환원된 듯한 이 정방형은 인터넷 상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사의 상징 색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조합되어 남한과 북한의 이미지를 구성하게될 최소한의 입자가 된다. 여러 색의 그리드로 이루어진 더 큰 이미지들은 낮은 픽셀로 인해 내용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화면 가운데를 흐르는 불규칙적인 붉은 색 그리드들은 재앙의 흔적은 무심하게 기록하고 있는 듯하다. 이 해상도 낮은 불안한 이미지들을 지나고 나면 티 한 점 없이 말끔하게 정리된 운동장, 골프장, 육상 트랙, 배구코트 등이 펼쳐진다. 다음엔 난데없이 북한 어린이, 북한 여자, 송두율 박사 등이 등장한다. 노재운이 보여주는 세계는 세계의 창을 자처하며 모든 것을 쓸어 담아 다시 정리해서 보여주는 새로운 복제기술의 산물과 관련된다.

간, 쓸개 다 내놓고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상층부로 진입하려는 남한은 고해상도의 세련된 화상구현 기술들로 비추어지지만, 북한의 이미지는 아직 얼룩덜룩하다. 그만큼 우리는 북한을 잘 알고있지 못한다. 정보입자로 재배열된 자연들도 창백한 탈색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 다음 911 테러, ‘hp'로 표시되는 다국적 기업인 휴렛 패커드 사의 로고, ‘humble package’란 문구가 들어간 비행기, 정찰기 위의 기업 마크들 등의 이미지가 붙어있는데, 작가는 이미지의 징검다리만 띄엄띄엄 놓아줄 뿐이고, 관객의 상상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엮어서 나름이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무슨 필연적인 하나의 스토리로 엮인 것은 아니지만, 이 모두가 임의적인 이미지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의 작품은 모든 것을 하나의 질서로 재편하려는 세계화의 압력이, 최첨단 정찰기이든 고해상도 화상구현 기술이든 정보기술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그것이 중심과 주변을 지속적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일방적인 규정에 의해서 세계인의 일상이 전쟁터로 변해 감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화의 질서에 저항하는 테러의 잿더미 속에서 십자가가 둥둥 떠있거나 정찰기나 전투기를 연상시키는 변형된 화살표, 그리고 다국적 기업인 휴렛 패커드 사의 로고들이 교차 배열된 이미지들은 그러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특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경기장은 정보사회가 예시하는 새로운 인생의 무대에 대한 비유로 다가온다. ‘더 빠르고 강력하게!’를 외치는 군사 정보기술과 1분 1초를 앞서가는 승자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경기장, 그리고 이러한 질서가 크고 작은 테러의 파국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논리적 연결고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Skins of South Korea’라는 부제를 지니는 이 전시는 오프라인 공간인 인사미술공간 뿐 아니라 온라인(www.time-image.co.kr) 상에서 함께 진행된다. 작가는 이 전시들을 ‘남한의 표면을 흐르는 보편적인 데이터’를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작가는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이미지들의 일부를 컴퓨터 상에서 그가 고안한 디지털 프로세싱 과정을 거친 후 출력하여 오프 라인 전시공간에 연출한다. 우리가 인터넷을 서핑할 때 명확한 출발점과 종착점이 없듯이, 이미지들은 어디서든 출발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전시장 가운데 설치된 LCD 화면에서는 작가가 배열한 이미지가 시간이라는 선적 질서를 따라 흘러나온다.

먼저 테러로 무너진 뉴욕 쌍둥이 빌딩을 연상시키는 두 개의 고층 빌딩 위에 비행기가 선회하고, 폭발에 이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위로 십자가들이 떠오른다. 낮은 픽셀의 알아보기 힘든 모자이크가 뜨고, 북한의 미녀가 활짝 웃는 모습으로 온다. 북한 미녀 옆에 비행기가 등장하고, 비행기가 길로 변하면서 미녀는 뚫린 길로 걸어간다. 갑자기 인공위성이 나타나 어떤 지형 위에서 바이러스처럼 폭발적으로 분열한다...관객은 여기에서 세계화의 질서, 테러, 북한의 개방, 또 다른 파국같은 이야기를 엮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2000-2004년 동안 ‘비말라키넷’을 통해 발표되었던 세 개의 작업을 ‘남한 3부작’이라는 타이틀로 재구성하여 전시공간에 연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비말라키넷’을 통해 발표된 내용에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북한의 이미지들과 크고 작은, 그리고 우발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어떤 계기에 의해 남한의 질서가 만나는 북한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세계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정찰기라든가 최첨단 정보 수집기계의 산물로 펼쳐진 북한의 모습들, 그리고 크고 작은 현실의 사건들이 정보의 바다에서 길어 올려지고, 선명한 재생기술로 구현되어 있다. 최신 영상표시 장치들로 표상되는 현실들이 말 그대로 전시공간에 ‘디스플레이’ 되는 것이다. 오프 라인 전시공간에 설치된 이미지들은 그 간에 해온 온라인 작업에 비한다면 빙산의 일각이겠지만, 현실은 디지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미술은 눈앞에 만져질 듯 존재하는 생생한 구체성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재운의 작품에서 이 생생함의 실체 역시 디지털 문화에 관련된 것이다.

이미지의 소스는 물론이고 고해상도로 출력된 화면이 주를 이루는 전시장은 대체로 인터넷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디지털 문화의 산물이다. 20세기 최대의 발명이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정보문화는 모든 것을 정보화하는 것을 넘어서 모든 인간 경험물을 디지털로 제작하여 판매한다는 발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인터넷은 세계화한 자본에 무한한 권능의 날개를 부여하는 동시에, 예술가나 반체제 사회운동가들에게는 또다른 실험적 장이 되고 있다. 이미 다가온 네트워크 경제 시대의 예술가들은 거대한 전자 도서관--압축된 문서의 자동검색이라는 개념이 인터넷의 바탕이 된다는 의미에서--이라 할 수 있는 인터넷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이동한다. 전시장에서 컷과 컷이 급격하게 이동하는 것은 웹서핑의 특성과 연관되는 듯하다. 작가는 네트워크의 의미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의 현실문화의 분석이나 코멘트를 이끌어내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가령 그의 작품에서 바이러스같기도 하고 인공위성같기도 한 형태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일상에 편재하는 감시, 관리 기술을 암시하는 동시에, 이러한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로도 보인다.

물론 네티즌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검색엔진은 광대한 사이버 공간을 모두 아우르지 못한다. 실제의 웹 공간은 야후와같은 검색엔진들이 제공하는 웹지도보다 몇 백배는 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정보들이 기존의 검색엔진에 포착되지 않은 채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웹’이다. 아마도 이미 소수 문화가 된 현대미술가들의 웹 공간 역시 이러한 영역에 속해있을 것이다. 노재운은 리플렛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없는 네트워크들은 단지 상상에 의해서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며, 물리적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네트워크는 정의될 수도 통제될 수도 없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을 구성하며, 이는 일종의 진공상태와도 같다고 말하면서, 여기에서 어떤 진실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혜성과도 같이 날렵하게 돌진하는 인공위성의 이미지와 다르게 전시장에 구현되어 있는 인공위성은 무척이나 허접해 보인다. 은색 공과 나무와 철 막대로 다리를 이어 만든 인공위성 앞에 붉은 바탕에 흰 글자로 ‘Worm_OsaMa_bAd_TaSte_oF_tHE wORLD=%$;Win32_Mac64.exe'라는 문귀가 써 있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의 문체를 감추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글자를 오려내어 문장을 만드는 얼치기 협박범같은 수법이다. 그것은 작가가 ‘타임 이미지’라는 웹 싸이트에 발표한 오사마 웜 프로젝트와 관련된 것인데, ‘오사마 웜’은 그가 우연히 발견한 실제 하는 바이러스로, 침투력과 전파력이 강하며 백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세계화된 폭력적 질서는 세계화된 저항을 낳고, 이 치명적인 질서에 대항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에 포착되지 않기 위해 끝없이 변이하며 탈주하고, 전체주의화 된 '유기적 질서'를 위협하는 질병적인 존재들이다.

현재 과학, 특히 정보기술은 한 사회의 지표가 되다시피 했지만, 그것은 전쟁, 환경파괴, 구조적 실업, 빈부격차 같은 새로운 갈등을 낳는 강력한 요인이다. 과학기술이 소수의 승자를 낳는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지배적인 사회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과학사가 주디 와츠맨은 기술혁신이 이제 거대한 투자를 요구하고 있고 하나의 집합적이고 제도화된 과정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기술발전은 일련의 복합적인 기술, 사회, 경제, 정치적인 요소들의 작용이다. 생산기술의 경우 대개 하나의 기술설비의 발달과 수용 배후에는 경제계급과 사회계급의 이해관계가 가로놓여 있다. 기술발달 과정은 기술혁신의 직접적인 환경 너머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이해 관계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문화적으로 유형화된다는 것이다.

전시장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휴렛 패커드 사의 로고는 기술장치의 구성 그 자체에 이미 들어와 있는 지배에 관한 언급처럼 보인다. 기술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지식과 신념과 욕망과 실천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사회관계들과 문화를 구현시킨다. CF 이미지처럼 모든 것을 깔끔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장치는 장치에 걸러지지 않는 것들을 정복이나 배제,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 사실 정보화 기술은 자연과 무의식까지를 포함한 모든 영역을 식민화하는 전면 전쟁의 전선으로 만든다. 이점이 정보화 된 미끈한 세계와 야만적인 테러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노재운의 작품에 깔린 맥락이다.

정보혁명으로 대변되는 첨단 과학기술은 자연과 사회를 재구성하면서 착취와 관리의 관점으로 재디자인한다. 생물학자이자 과학사가인 다나 해러웨이는 자연이 일련의 연동식 인공두뇌 체계, 그리고 자본주의적 시장의 견지에서 체계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지적한다. 시장은 자연도태라는 관점에서 가장 잘 접근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결핍은 역사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자연의 원동력이 된다. 본래 진보와 결핍은 자본주의 발달의 쌍생아였다. 자본주의가 공동의 선이 아닌 사적인 선을 위해 풍요로움을 특수한 형태로 전용하는 가운데 결핍을 유지시키는 체제라면, 이제 정보는 결핍을 새로이 창출하는 또 다른 수단이 되고 있다. 노재운의 작품에서 말끔한 이미지에 완전히 감추어진 것, 그리고 말끔한 이미지에 균열을 내고 언뜻 언뜻 돌출되는 폭력의 그림자는 최첨단 기술을 통해 체계의 논리를 재생산하는 새로운 지배적 문화에 대한 언급이다.


(미술과 담론,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