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건져올리는 낚시꾼

Ecstasy, 2006

이미지를 건져올리는 낚시꾼

이요훈


네트워크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미지란 어떤 의미일까. 검색사이트에서 몇 글자만 툭툭 치면 튀어나오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노재운은 그 이미지의 바다에서 유유자적거리는 낚시꾼이다. 그는 그 바다에서 이미지를 건져올리고, 장난치고, 조립한 다음 풀어놓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다시 헤엄치며 살아간다. 노재운의 이미지들이 단순하면서도 다양하게 읽히는 이유다. 그래서 어느 평론가가 노재운을 ‘분단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비주얼을 작품으로’ 만드는 작가라고 자신의 블로그에 적었을 때, 나는 속으로 ‘죄송합니다. 낚이셨습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인터넷을 생활처럼 이용하는 첫 번째 세대에 속하는 작가다. 그에게 인터넷은 단순한 그림판이 아니다. 다른 초기 넷아티스트들은 ‘다양한’ 기술을 이용하여 웹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인터넷의 특징인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에 집중하여 ‘인터랙티브’한 작품들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그는 몇몇 홈페이지를 통해 그림을 올리고, 아이디어를 얻고, 친구들을 만나고, 이야기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터넷이 ‘새로운 도구’였을 때, 그에게 인터넷은 이미 ‘생활’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시회를 구상하면서도 “링크를 클릭할 때 무엇이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다중 블랙홀을 만들"고 싶었다, 고 말한다.

노재운의 작품들은 현실이나 인터넷에서 우연히 포착되거나 수집된 이미지들로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일정한 내러티브가 있는 것처럼 조작되어지거나 늘어놓아진다. 하지만 그 늘어놓음의 간격은 너무 크거나, 너무 단순하다. 수십년이 넘는 시간적 간격이나 전혀 다른 공간을 상징하며 늘어놓아진 이미지들은, 거대한 서사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서로 부딪힌다. 너무 단순화된 이미지들은 수없이 많은 의미들로 다르게 읽혀버린다. 그래서 그는, 농담 삼아 자신의 작품들을 ‘새로운 형태의 영화’라고 이야기한다. 내러티브가 상실되었기에 너무 황량하지만, 그렇기에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로 만들어진 영화. 하지만 이미지 자체가 내러티브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이미지를 즐겨줄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은, 결국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이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면, 이미지는 그냥 웹상을 떠돌아다니는 더미(Dummy)가 되어버린다는 사실도.

그래서 노재운의 작품은 사막과 같다. 그 곳에 다가갈 수많은 길이 있고, 그 안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지만, 겉으로는 세련된 황량함만을 드러낸. 그는 그 사막으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을까. 그 사막을, 축제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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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당연하게, 작가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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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06년 무크지 ‘넥스아트’에 실린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