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적 시나리오

<스킨 오브 사우스 코리아 Skins of S.Kr>, 포스터, 2004

바로크적 시나리오 _ 노재운


김장언(기획, 미술평론)


PC 통신에서 분당 50원이라는 사용료를 내고 인터넷에 접속하던 시절,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에 민감한 사람들 사이에서 은근히 이목을 집중했던 익명의 '그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비말라키, 피바다, 부엌칼 공작실, 수족관새 등이다. 2000년에 그들의 현재에 대한 르포형식의 기획을 준비하기도 했는데 잡지사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당시까지는 사회에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물론 현재도 그렇다-일부는 유학 중이었고 다른 일부는 사업을 벌이다가 사기를 당했고 일부는 만화를 그리거나 작업이라는 것을 하면서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사회는 이들을 특이한 홈페이지 운영자정도로 인식하더니 이제는 그들을 정확히는 그들의 후속세대들을 '엽기'와 '폐인' 혹은 'B급 문화'의 징후들로 봉합해 버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단어가 대중화되기 이전부터 새로운 징후들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현재 그들은 어떤 것도 얻은 것이 없다. '엽기'와 '폐인' 혹은 'B급 문화' 의 용어조차 타인들에게 선점 당했다. 내가 만나보았던 그들은 어느 정도 자폐적이고 어느 정도 나르시즘적이고 어느 정도 세상에 관심이 없다. 폴 비릴리오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디지털 세상으로 떠난 그들은 삶에 대해 눈뜨는 것을 거부하고 영원한 유년의 시절로 이동해 버린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 '영원한 유년의 시절' 이란 단순히 부정적 의미의 미성숙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노재운의 세계를 시작으로 그들의 세계를 탐험해 보자.

온라인 미디어공간에서 징후적 존재였던 '그들' 중 한 명인 노재운이 비말라키라는 이름이 아닌 실면 '노재운'으로 미술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할 태세이다. 노재운은 최근 인사미술공간에서 개인전 'Skins of South Korea' 를 개최했는데, 그 스스로 이 전시는 매우 의도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노재운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전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오해와 오독을 낳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스킨(skin)을 하나의 오에스(OS)로 여기는 우를 범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기억할 것은 이번 그의 개인전은 South Korea 로 표상된 그의 스킨을 즐기고 그것이 마음에 든다면 갖다 쓰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스킨'을 '스킨로션'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당장 생각을 고쳐주길 기대한다. 여기에서 스킨은 제로보드 혹은 싸이월드의 스킨이다. 그래도 '스킨이 뭐야?' 하는 분들은 윈도우XP의 디스플레이 테마를 바꿔본 경험을 떠올리면 된다. 제어판/디스플레이로 들어가 테마를 바꾸는 행위가 바로 스킨을 바꾸는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스킨의 설정을 바꾸었다고 해서 적용 프로그램의 본질이 변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윈도우XP의 테마를 변경했다고 해서 윈도우가 맥킨토시로 변화되지는 않는다. 다만 맥킨토시 분위기를 낼 수는 있다. 그래서 그의 개인전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작가는 자신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South Korea를 테마로 하는 스킨으로 구성된 수퍼인터페이스를 제작했고 여기에 살아있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프로그램인 오사마 웜(Osama Worm)을 삽입시켰다. 이 때 South Korea라는 테마에 너무 집중하면 다소 오버해 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스킨은 맘에 들면 쓰면 되는 것이고 맘에 들지 않으면 안 쓰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에서 스킨의 본질과 스킨의 정치.사회학적인 의미를 논하기 시작하면 이것은 스킨 제작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 심지어 그 스킨이 미술계에 뿌려진다고 할 지라도 말이다.


삼류적 서사, 싸나이와 디지털 하드보일드

그의 작업 '볼사리노(Borsalino)'를 보자. 패션계에 종사하거나 혹은 1970년대 프랑스 대중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 가졌던 사람이라면 익숙한 단어일 볼살리노는 유럽 남성들이 갖고 싶어 하는 고급 중절모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패라리나 롤스로이스 같은 권위 및 신분을 상징한다기보다 오히려 프로월드컵 속의 나이키와 같은 것이고 조다쉬 사이에서 리바이스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 일시적 우월감의 대상물이고 소박하지만 허영기 많은 물신의 상징일 뿐이다. 우선 패션 브랜드로서 볼살리노는 그렇다.

영화 볼살리노는 1970년대 프랑스 대중영화로 그렇고 그런 느와르식 남성액션로망이다. 내용은 항구도시 마르세이유를 배경으로 하는 건달들의 이야기로 클리세들의 클리세들을 연결하고 그 연결들이 어처구니없이 사건을 만들고 그렇게 주인공들이 차례로 죽어버리는 그렇지만 짠하게 싸나이의 의리와 인생의 쓴맛들을 보여주는 영화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친구' 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일본영화감독 스즈키 세이준의 하드보일드 코믹영화를 떠올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자, 이제 노재운의 볼살리노를 보자. 그의 볼살리노에도 역시 두 명의 청년이 나온다. 그의 하드보일드 액션로망은 지하철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8개의 색으로 이루어진 8개의 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가시적 목적지는 상암 월드컵경기장 공원. 그래서 첫씬에는 한강시민공원 상암지구에서 유아용 자동차를 타고 있는 어린아이가 나온다. 으레 이런 영화들이 그렇듯. 우선 장소의 분위기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 순진한 아이들이 등장하게 되어 있다. 이제 본격적인 그들의 로망으로 참여하기 위해서 다음신을 누르면, 우리의 주인공들 두 청년이 ATM 앞에서 장난을 친다. 싸나이 액션로망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뜬금없이 하늘공원에서 바라본 목동아파트단지 모습이다. 당황할 것은 없다. 이건 이들이 하늘공원에서 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거나 멋진 스카이 뷰를 제공할 뿐이니까.

그리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다시 나오고 다음 씬에는 하늘공원 내부가 보여진다. 누군가 하늘공원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씬에는 월드컵 에스컬레이터가 보이는데 그 곳에 두 청년은 없다. 그리고 갑자기 칙칙하고 황당해 하는 다른 사내의 얼굴이 하늘공원을 배경으로 보인다. 이게 뭐지? 다음 장면을 기대해 보자. 다음 장면은 전철에 설치된 수평 에스컬레이터에 주황색 홀터 넥 탑을 입은 아가씨가 서 있다. 아가씨는 아무 말 없이 묘한 미소를 지운다. 음. 우리의 두 총각이 이 이가씨를 따라갔군. 그럼. 하늘공원의 그 사내는 물먹어겠네. 그러나 싸나이 액션로망에서 매력적인 아가씨의 유혹은 이해하고 용서해주어야 하는 미덕 같은 것이다.
인터넷과 같은 전방위 미디어에서 소통되는 서사구조는 대부분 shaggy-dog story를 기본전제로 시작된다. 혼자 지껄이이다 필 꽂히면 사람들 모이는 것이고 아니면 그만인 것이다. 네그리폰테는 그이 책에서 간결함이 이메일의 생명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이메일로 의사를 전달할 때는 요점만 명확히 언급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메일의 언어는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문어적 언어가 아닌 구어적 언어라는 것이다. 순차적 시간구조가 아닌 압축적 시간구조로 모든 정보량이 이동되는 인터넷 환경에서 논리적인 언어구조는 힘을 발휘할 수 없고 압축적인 구어적 표현이 힘을 받는다. 심지어 이미지가 모든 서사적 형태를 함축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은 소위 말해서 표현이 '쎄다'. 그리고 여기에다 하드보일드한 성격들이 더해진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초기 인터넷에서는 그랬다. 어디에서나 시간이 지나면 다양한 스타일이 나오는 것이고 변종들이 있기 마련 아닌가.


세 개의 스킨

그럼 이제 노재운의 개인전 S.S.K 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그의 이번 전시는 앞서 언급했듯이 스킨들이 결합된 수퍼인터페이스이다. 작가 역시 이 전시가 스킨이기 때문에 사용자들에 의해서 나름대로 재구성해도 좋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이것은 사용자들이 새롭게 재구성되는 S.S.K. vol2 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가 이번에 만든 스킨은 매우 정치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는 그가 선택한 테마가 매우 정치적 이슈들로 똘똘 뭉쳐 있고 그 함의들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이번 스킨의 주제는 세 개로 구분될 수 있는데 각각 한국. 북한. 미국의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구분을 이렇게 할 수도 있다. 하나는 '글로벌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테러리즘'이다. 이 모든 것들에 공통된 테마는 South Korea 라는 실제 대상과 연결되어 있고 또한 가상의 South Korea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가 만들어 놓은 스킨은 매우 산만해 보이지만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우선 김현희의 어린시절 사진은 두 개의 축으로 나뉘어 가는데 하나는 테러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 미녀응원단이다. 테러리즘은 9.11으로 상징화되며 이것은 다시 두개의 축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타워팰리스로 대표되는 한국의 자본주의의 승리와 다른 하나는 미국식 모더니즘의 조롱인 모던칼라 스와치(이런 스와치가 정말 있다고 한다)와 새로운 자본주의 형식인 마이크로소프트 블루와 애플 레드가 그것이다. 이 전체 환경속을 전방위적으로 가로지르는 두 개의 물체가 있는데 하나는 'Humble Package' 이고 다른 하나는 '웜 바이러스'이다. 'Humble Package' 가 마이크로소프트에 비해서 어떤 정치적 공격도 받지 않지만 거의 컴퓨터 환경의 전 영역을 점령하고 있는 휴렛펙커드(최근 HP의 기업광고는 너무 아름답지만 섬뜩하다)를 상징한다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웜바이러스 이름이 오사마Osama 라는 데서 허허실실 우스개의 다른 전형을 볼 수 있다. 남한 3부작은 이번 인터페이스의 서플먼트로 여겨지는데 한국사회에서 북한이 타자화되는 방식과 미국과 결합하면서 남한 스스로 타자화되는 상황 그리고 남한 북한 모두가 타자화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 모든 타자화는 현실의 판타지로 존재한다.

이 3부작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Fatal Beauty 다. 이 작업은 북한 미녀응원단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수집하고 이 사진을 다시 홍은철의 요들송 '아름다운 스위스 아가씨'를 배경으로 재편집한 것이다. 이 작업이 의미있는 것은 이작업은 젊은 여성들로만 구성된 응원단들을 한국사회에 보낸 북한 정부의 의도와 이들의 전형적인 남성시각(male gaze)으로 읽어낸 한국 언론들 그리고 이것을 즐겼던 시민 모두가 다양한 레이어로 중첩되기 때문이다. 홍은철의 요들송은 그 생뚱맞은 노래형만큼이나 이 상황들을 생경하게 전이시켜 버린다. 그의 이러한 스킨에 대해서 민중미술의 흔적을 찾거나 혹은 정치적 진정성이나 재생산에 대해서 질문한다면 다소 무의미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디씨인사이드 속 행자들이 벌였던 '개죽이도 투표한다' 캠페인의 정치적 함의와 디씨인사이드의 정치적 역량과 그 방향을 요구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행자들 사이에서 노빠들도 있을 것이고 이걸로 뭘 해 보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행자는 행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가 만들어 공개한 스킨이 마음에 들면 사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해버리면 되는 것일까? 비릴리오는 사고 형식을 변화시키는 모든 것들은 정치적이고 혁명적이라고 언급했다. 디지털 혁명과 정보 과학의 혁명은 분명 우리의 인식방식과 사고구조를 변화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스킨이 우리의 사고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미디어 환경을 데코레이팅할 뿐이다.

다시 비릴리오에게로 돌아가보면 그는 20세기말 예술은 더 이상 과거에 대해서 말하지도 안고 미래를 나타내지도 않는다고 했다. 예술은 동시성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의 모습을 구현하지도 않는다. 동시대의 징후들을 데코레이팅할 뿐이다. 이러한 경향을 나만의 용어인 '바로크적 시나리오'로 명명해 본다. 왜냐하면 바로크는 동질적인 성격이지만 제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세계관의 표현이고 또한 시대적 징후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식 언어로 표현한다면 바로크는 어떤 본질을 지시하지 않고 사물을 발명하지도 않으며 단지 수많은 주름들을 생산할 뿐이다. 노재운, 초기의 '그들'은 주름을 생산한다. 그들은 동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 물론 인터넷 미디어 환경에서 일부 프런트 사용자들은 환경 즉 OS 자체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은 표피를 스캐닝하고 그 징후들을 가시화시키며 사회를 데코레이팅한다. 이것이 매우 정치적일지라도 이것은 뽀샵질의 결과물이고 현실에 대한 희극의 공연장이며 바로크적 쾌락의 상태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활동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미디어 환경에서 유저들은 현실에 대한 허구적 판타지를 재생산하며 그 판타지는 압축적 시공간의 흐름속에 끊임없는 주름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 주름이 앞서 이야기한 유아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시 그 유아적 세계가 뭐냐고? 그건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표피 즉 스킨의 효과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간, 2004년 8월호)